운명의산 낭가파르밧 한국 초등
“같이 죽느냐? 친구를 버리고 혼자 내려가느냐. 정말 수백 번 아니 수천 번도 더 고민했다.”-박희택 대원.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같이 죽어라. 살아서 내려올 수 있다면 데리고 내려오라.”- 원정대장 조형규.
1992년 6월 29일 오후 3시 15분 해발 8125m 낭가파르바트 정상.
박희택은 4캠프를 출발한 지 10시간 만에 꿈에도 그리던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서 있었다. 그는 ‘운명의 산’ 최정점에서 세상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간절하게 등정 소식을 기다릴 원정대를 생각하면서 베이스캠프에 무전을 보냈다. “여기는 정상이다. 가장 높은 곳에 섰다. 정상이 틀림없다.”
순간 베이스캠프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대원들은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등정의 기쁨을 눈물로 표현했다. 이윽고 애국가를 불렀다. 누가 선창했는지 모르지만 모두 애국가를 부르고 있었다.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이미 그들의 볼에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강인한 산 사나이들의 눈물은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조형규 원정대장 역시 영광과 등정을 위하여 숱하게 흘린 지난날들을 생각하며 자신도 모르게 하얀 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경남산악연맹은 세계 8000m 산 가운데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운명의 산’ 낭가파르바트 정상을 앞두고 새로운 루트를 통해 정상에 서면서 ‘코리안 스텝’이라는 새로운 루트를 만드는 성과를 올렸다. 특히 무산소 등정과 셰르파나 고소포터 없이 대원들 단독으로 성공시킨 의미 있는 등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낭가파르밧원정팜플렛초청장
낭가파르바트는 우르두어로 ‘벌거벗은 산’이라는 뜻으로 세계 8000m 가운데 가장 잔인한 산으로 악명이 높았다. 낭가파르바트 주변에 사는 현지인들은 ‘산중의 왕’을 의미하는 ‘디아미르(Diamir)’라고 부르며 숭배한다. 하지만 셰르파들 사이에서는 ‘죽음의 산’으로 기피 대상 1호인 산이다. 파키스탄에 위치한 낭가파르바트를 네팔 셰르파들이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수많은 선배 셰르파들의 목숨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낭가파르바트는 인류가 최초로 8000m를 도전한 산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알피니즘의 창시자인 영국의 알버트 머메리(1855~1895)는 125년 전인 1895년 낭가파르바트에 도전했다. 그는 6000m를 넘어섰지만 8월 24일 2명의 구르카 병사와 함께 실종됐다. 머메리는 정상을 등정하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 루트를 따라 올라갔는지가 중요하다는 ‘등로주의’를 주창한 산악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도전이 무모한 것임을 알았지만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기꺼이 하얀 산에서 죽음을 맞이한 진정한 알피니즘 개척자로 현재까지 평가받고 있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 국민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해 8000m 등반에 나섰다. 국가적 지원을 받은 독일 산악인들이 선택한 산은 바로 낭가파르바트였다. 그러나 낭가파르바트는 독일인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은 산이었다. 1932년 독일 1차 원정대가 실패로 끝나고 1934년 2차 도전에 나섰다. 원정대는 악천후로 하산을 하지 못하고 버티다 독일인 4명과 셰르파 6명이 목숨을 잃었다. 1937년 6월 15일 자정께 낭가파르바트 초등을 노리던 독일 원정대는 4캠프(6180m)에서 눈사태에 휩쓸려 대원 7명과 셰르파 9명이 사망하는 히말라야 최대 참사를 겪었다. 1938년에는 대원 1명과 포터 1명이 사망하면서 독일인이 낭가파르바트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28명으로 늘어났다. 독일은 20여 년간 이곳에서 6차례 도전에 28명의 목숨을 잃은 후 1953년 헤르만 불이 단독으로 8000m에서 비박을 하며 등정하는데 성공했다. 헤르만 불은 혼자서 41시간 만에 살아돌아오는 기적을 연출하며 세계 초등을 독일에 안겨주었다. 세상 사람들은 낭가파르바트를 ‘독일의 산’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도 낭가파르바트에서 희생을 피해가지 못했다. 1989년 전주대OB 낭가파르바트원정대와 1990년 광주낭가파르바트 원정대는 김광호 대원과 정성백 대원을 잃기도 했다.
경남은 1990년 들면서 세계 8000m 14개 봉우리를 모두 오르겠다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마련했다.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걸림돌이 된 것이 바로 낭가파르바트였다. 산악인들은 낭가파르바트의 혹독한 등반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경남의 산악인들은 낭가파르바트 원정 계획을 세우고 치밀한 준비와 함께 엄격한 훈련을 거쳐 대원을 선발했다.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원
낭가파르바트를 등정하기 위한 선봉장은 조형규 원정대장이었다. 그는 1989년 눕체 동계 세계초등을 이끌어내 국내는 물론 세계 산악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조형규 대장은 “1988~1989년 겨울철 동계 눕체 세계 초등을 달성한 경남 산 사나이들의 능력과 끝없는 도전 정신은 8000m 자이언트봉을 충분히 등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낭가파르바트는 한국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으로 생각했다.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 표고 차가 에베레스트 3500m에 비해 1000m가 더 높은 낭가파르바트를 경남의 산악인들이 꼭 정상에 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원정대를 구성했다”며 원정 배경을 밝혔다.
원정대는 조형규 원정대장을 비롯해 이병갑 부대장, 배현철 등반대장, 박희택, 박쾌돈, 임영택, 송재득, 임종범, 강덕문, 김화곤, 오세철, 이은수, 정영상, 이명용 대원이 참가했다.
1992년 5월 27일 원정대는 푸른 초원이 펼쳐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3500m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낭가파르바트 베이스캠프는 8000m 14개 베이스캠프 가운데 가장 낮아 접근이 쉽고, 자연경관이 가장 빼어난 곳이다. 그러나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는 45000m가 넘는 표고차를 극복해야 하기 때문에 가장 등반하기 어려운 산이기도 하다. 베이스캠프에는 경남연맹을 비롯해 광주 우암산악회팀과 서울시연맹도 함께 했다. 대원들은 충분한 휴식을 가진 후 등반을 시작했다. 그러나 시작이 좋지 않았다. 대원들은 두 번의 눈사태를 맞았지만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열흘간의 루트 작업 끝에 이번 등반의 최대 고비인 수직 200m의 대암벽 지대를 돌파하며 6월 10일 2캠프(6200m)를 설치했다. 경남연맹은 당시 광주 우암팀과 서울시연맹과 공동으로 루트 작업을 실시해 6월 24일 5시간에 걸쳐 얼음을 깎아내 3캠프(6800m)를 설치했다. 그리고 4일 뒤 원정대는 정상으로 가는 마지막 캠프인 4캠프(7550m)를 건설하는데 성공했다.
조형규 대장은 고민 끝에 정상 공격을 곧바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그는 6월 29일을 ‘D-day’로 정하고 1차 정상 공격조는 박희택·송재득·임영택 대원으로 결정했다. 그날 저녁 조형규 대장은 저녁 정상 공격조에게 무전을 보냈다. “저녁은 잘 먹었나? 긴장되겠지만 잠 잘 자고 내일 정상에 갈 때 광주 우암팀과 함께 정상에 같이 서라. 그리고 내일 아침은 꼭 먹고 출발해라.” 그는 한숨도 자지 않고 기도를 올렸다. “대원들이 무사히 등정하고, 안전하게 베이스캠프로 하산해 달라고….”
6월 29일 새벽 2시. 베이스캠프는 싸늘한 냉기가 맴돌았다. 베이스캠프에 있던 모든 대원들은 대장 텐트로 모였다. 조형규 대장은 4캠프에 있는 대원들을 무전으로 호출했다. 박희택 대원이 보고했다. “지금 일어나서 물을 끓이고 있습니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준비가 끝나면 곧바로 정상 공격을 시작하겠습니다.” (하편에 계속)
포기 하지않은 우정…악몽의 귀환마저도 ‘완벽’
매스너의 깡통 발견…등정기념품으로 목걸이 남겨
정상 정복조, 탈진 속 어둠 내린 8천 고지 더딘 하산
도전 앞둔 2차 공격조, 안전한 귀환 위해 발길 돌려

1992년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선 박희택 대원 낭가파르바트 베이스캠프 하늘에는 별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좋은 날씨가 예상되면서 등정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오전 5시 20분 공격조가 텐트를 떠났다. 베이스캠프에서도 등반을 확인했다. 경남과 광주 우암팀은 5명의 대원이 쉬지 않고 나아갔지만 1명의 대원은 컨디션이 좋지 않아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명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베이스캠프에 있던 대원들은 누가 4캠프에 남았는지 알수가 없었다.
베이스캠프에서는 망원경으로 미리 루트를 파악하고 공격조에게 정상으로 가는 길을 안내했다. 오전 9시 10분 공격조와 교신한 베이스캠프는 임영택 대원이 4캠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당초 원정대는 킨스호퍼 루트를 따라 등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조형규 대장은 망원경으로 관찰한 결과 다른 루트를 찾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킨스호퍼 루트는 정상으로 이어지는 왼쪽 능선을 타고 전위봉을 거쳐 정상으로 가야 하지만 바람이 강하게 불 경우 큰 위협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조형규 대장은 또 1985년 폴란드의 유명 여성 산악인 반다 루트키에비츠가 오른 전위봉과 정상 사이 중앙 골짜기로 곧바로 올라 오른쪽 정상으로 돌아가는 루트는 눈이 많으면 1시간 이상 걸린다는 보고서를 읽었기 때문에 새로운 루트를 찾기 시작했다.
결국 조 대장은 낭가파르바트 좌측 전위봉과 정상 사이의 가운데 쿨르와르를 오르다가 오른쪽 너덜지대를 통과, 오른쪽 정상으로 오르는 루트를 선택했다. 정상 공격을 시작한 지 6시간 정도가 지나자 날씨가 나빠졌다. 오전 11시 30분 베이스캠프에는 눈과 우박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강한 바람과 천둥번개도 치고 있었다. 베이스캠프의 악천후를 아는지 모르는지 박희택 대원과 광주 우암팀 김주현 대원은 전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3시간 정도 계속되던 악천후는 오후 2시 30분 구름이 걷히면서 정상 부위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시간이 지나자 정상에 햇빛이 찾아들었다. 정상 공격조가 거의 정상에 도착할 시간이 되었지만 무전이 되질 않았다. 베이스캠프에서는 계속 호출했지만 공격조는 답이 없었다. 침묵이 흘렀다. 베이스캠프에 있던 대원들의 입이 타 들어갔다. 오후 3시 15분 드디어 무전이 날아들었다. 박희택 대원이었다. “베이스캠프, 여기는 정상이다. 정상이 틀림없는 것 같다.” 순간 베이스캠프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대원들은 자신이 등정한 것처럼 한마음으로 기쁨을 누렸다. 광주 우암팀 김주현도 역시 등정에 성공해 베이스캠프는 축제 분위기였다. 1992년 한국원정대가 낭가파르바트에서 시즌 첫 등정이라는 쾌거였다.

홀로 정상에 선 송재득 대원이 직접 사진을 찍었다. 얼마나 힘든 등반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다. 2시간 뒤에 정상에 선 송재득 대원이 탈진하면서 박희택과 송재득 앞에는 죽음의 하산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형규 대장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박희택 대원에게 지시했다. “희택아! 등정을 확인할 수 있도록 사진을 완벽하게 촬영해라. 내려올 때 안전에 특별히 주의해서 하산해라. 그리고 송재득 대원이 올라올 때까지 기다려라.”
박희택 대원은 정상에서 사진 촬영을 마치고 송재득 대원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기다리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1978년 라인홀드 매스너가 정상 등정을 증명하기 위해 묻었던 기념물을 찾기 시작했다. 라인홀트 매스너는 1970년 동생 귄터 매스너와 초등한 이후 1978년 단독으로 두 번째 등정했다. 그러나 재등 당시 카메라가 고장 나면서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매스너는 사진 대신 오스트리아 산악인 이름이 적힌 종이를 깡통에 넣고 묻었다. 박희택은 매스너의 깡통을 어렵지 않게 찾았다. 그는 종이에 자신의 이름을 적을 계획이었지만 볼펜이 없어 자신의 목걸이를 등정 기념물로 남겨두었다. 23년이 지난 2005년 김창호·이현조는 낭가파르바트 등정에 성공한 이후 매스너 깡통을 찾아 내려왔다.

6월 29일 새벽 5시 20분 4캠프를 출반한 박희택, 송재득 대원은 정상에 오른 지 17시간 만인 밤 10시 25분 4캠프로 돌아왔다. 오후 4시 40분 김주현 대원은 이미 1시간 전에 하산했다. 박희택 대원은 정상에서 1시간 넘게 머물렀지만 송재득 대원은 오지 않았다. 박희택 대원은 추위로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었다. 박희택은 베이스캠프에 무전기로 보고했다. 조형규 대장은 결국 박희택 대원에게 100여 미터를 하산하라고 지시했다.
박희택은 하산 도중 송재득 대원을 만났다. 박희택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내려가는 길에 송재득을 만났다. 컨디션이 어떻냐고 물었더니 반드시 정상에 가겠다고 했다. 정상에 가려는 의지가 확고했다.”
그는 이 사실을 베이스캠프에 보고했다. 베이스캠프에서는 등정 후 하산하는 시간 등을 검토한 후 송재득 대원을 정상으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송재득은 베이스캠프 승낙을 얻고 정상으로 향했다. 1시간 후인 5시 40분 송재득은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설 수 있었다. 정말로 정상에 선 기쁨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정상에는 이미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송재득은 쏜살같이 밀려오는 어둠을 걱정했다. 또 밑에서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을 박희택을 생각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그는 조급하게 하산하다 발목을 다치고 말았다. 하산 속도는 늦어졌고 박희택과 만났을 때 이미 그는 탈진한 상태였다. 박희택은 이 사실을 베이스캠프에 알리고 구조를 요청했다. “재득이가 걷지를 못한다. 지원바란다.”
조형규 대장은 다급하게 명령했다. “끝까지 재득이를 데리고 하산해라, 희택아 포기하지 마라.” 조 대장은 곧바로 2차 정상 공격조에 구조를 지시했다. 당시 3캠프에는 박쾌돈, 오세철, 임종범이 대기하고 있었고 2캠프에는 3차 정상 공격조로 강덕문, 김화곤, 이명룡 대원이 머물고 있었다. 조형규 대장의 명령에 따라 2~3캠프에서 대기하고 있던 대원들은 구조작업에 나섰다. 정상에 서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두 명의 대원들을 안전하게 하산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3캠프에서 4캠프로 트래버스(traverse)하고 있는 대원들. 조형규 대장은 박희택 대원에게 단호하게 명령했다. “희택아! 재득이를 포기하지 마라.” 조형규 대장은 “희택아! 재득이를 포기하지 마라”고 반복했다. 그가 박희택에게 해줄 수 있는 다른 말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형규 대장의 명령은 애원의 목소리로 변하기 시작했다.
낭가파르바트 전체에 어둠이 깔린 오후 7시. 박희택은 필사적으로 송재득을 부축하며 하산을 시작했다. 박희택은 절망감이 밀려왔다. 그는 회상했다. “재득이는 비틀거리며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넘어졌다. 계속 이 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정말 앞이 캄캄했다. 과연 안전하게 내려갈 수 있을까?”
다행히 광주 우암팀 김주현 대원이 두고 내려간 자일을 이용하면서 안전은 어느 정도 확보한 상태였다. 그러나 주위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앞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해발 7550m의 4캠프로 귀환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박희택은 다시 고민하기 했다. 그는 산악인으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 갈등을 겪었다. 박희택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지난 사건을 되돌아봤다.
“같이 죽느냐? 아니면 혼자 내려가느냐?” 그는 수천 번을 고민하고 결정하고 번복하기를 수없이 했다. 박희택은 회상했다. “정말 엄청나게 고민했다. 같이 가기에는 너무 힘이 들었다. 그렇다고 두고 가면 대원들과 재득이의 가족들을 어떻게 볼 수 있을 것인가? 내 평생에 가장 고민을 많이 한 시간이었다.”
고민하는 박희택에게 조형규 대장이 설득하기 시작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같이 죽고, 살려면 같이 살기를 바란다.” 박희택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송재득과 함께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늦은 하산이었지만 시간은 흘렀고, 그들은 차츰차츰 고도를 낮춰 갔다. 하산을 시작한 지 2시간여 만에 그들은 4캠프로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다. 헤드 랜턴으로 베이스캠프에 도착 사실을 알렸다. 베이스캠프에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6월 30일 정상 공격을 준비했던 대원들은 하산하는 두 대원과 함께 베이스캠프로 무사히 하산했다. 2~3차 정상 공격을 준비한 대원들은 체력이 남아 있었고 컨디션도 좋아 등정 욕심을 모두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등정을 포기하고 탈진한 대원들을 안전하게 하산하는 진정한 용기를 보여주었다. 박희택 대원도 탈진한 송재득 대원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함께 하산해 진정한 산 사나이들의 멋진 우정을 과시했다.
조형규 대장은 회상했다. “히말라야 원정은 준비부터 등반 과정, 한국으로 돌아오는 순간까지 긴장과 기다림의 연속이다. 지난 1년간 국내에서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훈련하며 ‘운명의 산’ 낭가파르바트에 오기 위해 대원들이 흘렸던 땀과 눈물을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눈물을 흘린 후 환한 미소를 짓는 대원들을 보면서 가장 큰 보람을 느꼈다. 무엇보다 대원을 잃지 않고 모두 돌아온 것이 가장 완벽한 등반이었다.”
박명환 경남산악연맹 부회장·경남과학교육원 홍보팀장

2캠프로 오르고 있는 박쾌돈 대원.

1캠프로 향하는 대원들.

5월의 마지막 날 1캠프를 설치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히말라야로 대원들을 보낸 부인들은 등정 소식에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낭군님께 올리는 글]
너무나도 기쁘고 반가운 소식.
무엇으로 표현하오리까.
모두들 어찌할 줄 몰라 뜬 눈으로 밤을 지샜나이다.
마음조인 두 달은 어디로 가고 기쁨만 충만한 오늘….
이 기쁜 소식 무엇으로 표현하오리까.
고된 훈련의 지난 1년 정상으로 다 씻어구나.
멋지고 훌륭한 낭군님의 모습 눈부셔 어찌 뵈오리.
보고싶고, 그립고, 안기고 싶은 날들 많았건만
어찌하여 뵈오리.
한국의 남아들, 경남의 남아들, 우리 고장의 남아들.
세계에 이름을 떨친 남아들이여.
장하시오. 훌륭하시오.
그 빛나고 그을린 얼굴, 어찌하여 뵈오리.
부족한 여인네들 훌륭하시고 장하시고 멋진 남편들게
머리숙여 무릎꿇어 경하드리나이다. 축하드리나이다.
금의 환향 하시는 날 편안히 모시겠나이다.
너무나도 기쁘고 반가운 소식
무엇으로 표현하오리까.
-전 대원 각시 드림-
박명환 경남산악연맹 부회장·경남과학교육원 홍보팀장
출처 : 경남일보(https://www.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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